케이부동산뉴스 김교민 기자 | 국가보훈부는 일제강점기, 상하이 의거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92주기 추념식’이 19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윤봉길 의사 묘소에서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이희완 국가보훈부 차관, 명노승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해 기념사업회 회원, 독립유공자 유족 등 300여 명이 참석하는 추념식은 국민의례와 약전봉독, 어록낭독, 추념식사 및 추념사, 헌화·분향, 윤봉길의사의 노래 및 추모가, 묵념, 유족인사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1908년 충남 예산 출생의 윤봉길 의사는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 입학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배척하며 학교를 자퇴하고 사설학당인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이후 1928년 부흥야학원을 세워 농민의 자녀들을 교육하고, 이듬해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193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 결의를 다진 윤 의사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본군의 전승 경축식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리자, 오전 11시 40분경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투척했다. 이 의거로 시라가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이 사망했고, 노무라 중장과 시게미쓰 주중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의 의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중국의 지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으며, 그해 5월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25세 나이로 총탄을 맞고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요청에 따라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되어 1946년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92년 전, 의사님께서 단행하셨던 의거는 온 겨레에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고, 일제에 항거했던 애국 청년들에게는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면서 “광복 80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우리 국민, 특히 미래세대들에게 의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유공자께서 일구신 자랑스러운 역사와 숭고한 정신을 기억·계승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겠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