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찌 오셨습니까?” 서른 중반의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진 사내가 급히 뜰로 뛰어내려와 공손하게 김준흥을 맞이했다. “최 공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아니 올 수 있겠는가.” 김준흥이 대궐에서 퇴청하여 바로 온 것인지, 복색은 관복 차림이었다. “안 그래도 임지로 부임하기 전에 찾아뵈려 했습니다. 먼저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단정한 몸가짐의 사내는 예의를 갖추며 김준흥을 사랑채로 안내했다. “그래, 부성군(충남 서산)으로 간다 들었네만.” 자리에 앉으며 김준흥이 물었다. “예, 대산군(전북 정읍)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갈리게 되었습니다.” 사내가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자네, 부성군의 중요성을 알고 있겠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대답했다. 사내는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한 얼굴에, 봉황의 눈을 연상케 하는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김준흥은 그의 대답에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자네를 귀히 여기고 계시니, 충심을 다해 부성군을 다스려 주시게.” “아는 것이 많지 않으나 힘을 다해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성군은 서해 중부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서북의 패서 지역을 제외
대궐에서 조회를 마친 김민후는 같은 당파인 잡찬 박우와 파진찬 김정운을 뒤에 달고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견훤 놈이 수단이 대단한가 보오!” 김민후가 구겨진 얼굴로 서실의 교의에 털썩 앉았다. 김정운과 박우도 늘 그러했던 것처럼 김민후를 중심에 두고 좌우로 자리를 잡아 앉았다. 두 사람의 얼굴 역시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제껏 박 공이 낸 계책이 들어맞지 않은 적이 없건만, 이번 계책은 견가 놈을 빗겨 나가는 모양이구려.” 씁쓸한 낯빛으로 웃으며 김민후가 말했다. “능창이란 자가 만만치 않다 들었는데, 일전 한 번 벌이지 않고 그리 쉽게 견훤에게 고개를 숙일 줄은…….” 서먹하고 떨떠름한 얼굴빛의 박우가 끝내 말끝을 맺지 못했다. 견훤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김민후는, 박우가 제안한 ‘압해현의 능창을 이용하자’는 계책을 합당하다 여겨 진성여왕에게 직접 주청을 올렸었다. “폐하, 비장 견훤이 변방의 수적들을 소탕했다 하나, 압해현의 능창이라는 자는 여전히 서해 바다를 어지럽히며 조정을 능멸하고 있습니다. 견훤에게 영을 내리시어 능창을 사로잡게 하소서.”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은 진성여왕은 그의 주청을 흔쾌히 윤허했다. 왕명은 그대로 견훤에
한편, 정효부인은 소송이 참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실신했으나, 왕봉규가 의원을 보내 침을 놓고 지극정성으로 돌보게 한 덕에 겨우 의식을 차렸다. 정효부인은 지아비의 죽음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비통함과 참담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자신을 돌보던 의원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자진하려던 마음을 꺾게 되었다. 소송과 혼인하고 십 년이 넘도록 가지지 못했던 아이를 마침내 잉태하게 된 것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자식을 지아비가 세상을 떠나고서야 얻게 되었으니, 그 안타까움과 원통함을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정효부인은 의원에게 자신이 회임한 사실을 철저히 함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소송의 하나뿐인 혈육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고, 붉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홀로 맹세했다. 그렇게 무서운 다짐을 하던 찰나, 왕봉규가 그녀의 거처에 찾아들었다. “몸이 편치 못하시다 들었는데, 지금은 좀 어떠십니까?” 왕봉규는 정효부인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를 밖으로 물리치고 자리에 앉았다. 왕봉규는 전부터 공무로 소송을 여러 번 찾아보았던 터라, 정효부인과는 서로 안면이 있는
“이미 밤이 깊었습니다. 내일 출병을 위해서라도 이만 파장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왕봉규가 차윤웅에게 은밀히 눈짓했다. 차윤웅 역시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하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소송은 차윤웅과 왕봉규가 등 뒤에 감추고 있는 패악한 흑막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온화한 낯빛으로 두 사람을 배웅했다. 관아를 나선 두 사람은 어둠이 짙게 깔린 성벽 길을 걸었다. “저 어린 도독 놈이 실로 위험천만한 자였소. 어찌 저토록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계책을 머릿속에 품고 있었단 말이오? 귀족 가문의 철부지인 줄로만 알았거늘…….” 차윤웅이 절레절레 머리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식견과 지략이 대단한 자입니다. 만일 우리가 거사를 오늘 밤이 아닌 다음으로 미루었더라면, 결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당했을 것입니다.” 왕봉규가 차윤웅의 말에 동의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소송이 말한 무주의 견훤이라는 자도 참으로 대단하오. 도대체 무략과 용맹이 얼마나 뛰어난 자이기에 그 패악한 수적 놈들과 서남해의 유력한 관장들을 모조리 도륙했단 말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실로 무서운 자입니
“나리, 무슨 근심되는 일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의령현 부장(副將) 은상이 말안장에 몸을 맡긴 채, 어두운 안색으로 흔들거리며 나아가는 왕봉규를 보며 물었다. 왕봉규(王逢規)는 은상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대답 없이 그저 멍하니 앞만 응시하며 나아갈 뿐이었다. “나리!” 은상이 목소리를 한층 높여 재차 기척을 냈다. “……무슨 일이냐?” 왕봉규가 그제야 은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길이 험해 자칫 낙마하실까 염려되어 여쭈었습니다.” 은상은 왕봉규의 총애를 받는 측근답게 주군의 안위를 염려했다. “별일 아니다. 이제 저 고개만 넘으면 되겠구나.” “예. 저편에서 먼지가 흩날리는 것을 보니, 그들이 먼저 도착해서 진(陣)을 갖추고 기다리는 듯싶습니다.” 은상이 손짓으로 고개 너머를 가리켰다. 왕봉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채찍을 가해 속도를 높였고, 은상은 옆에 선 군관에게 장졸들의 걸음을 재촉하라 지시했다. 은상의 물음에 왕봉규는 아무 일도 아니라 둘러댔지만, 실은 가슴속 깊이 무거운 고민을 짊어지고 있었다. 왕봉규는 천주(경남 의령군)의 호족으로, 신라 조정으로부터 의령현 태수(太守)로 임명되어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헌데 아버님, 고작 그 말씀을 물으시려고 저를 부르신 것입니까?” 아들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창창하고 푸른 하늘 위 구름 속을 걷는 듯한 몽롱한 기분에 젖어 있던 용건은 그제야 흠칫 놀라며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다. 네게 물어볼 말은 따로 있다.” 들뜬 마음을 겨우 다독인 용건이 이내 중후한 기색을 되찾고 본론을 꺼내놓았다. “건아, 이 아비는 네 말대로 진정한 영웅의 길을 걸어볼까 한다.” “영웅의 길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이 아비는 조만간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용건의 힘이 실린 음성이 서실 안을 웅장하게 울렸다. “그렇다면 이제 신라 조정과는 완전히 결별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제 허울뿐인 사찬의 벼슬 따위는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신라와의 인연을 끊을 것이다.” “장하십니다, 아버님!” 왕건의 눈동자에 아비를 향한 존경의 빛이 가득 차올랐다. “거병을 결단하셨다면, 조만간 군을 움직이실 요량이십니까?” “거병을 하면, 당연히 진병(進兵)하여 세를 넓혀야겠지.” “그렇다면 대군이 나아갈 첫 방향은 어디로 보고 계십니까?” “너라면 과연 어디로 먼저 나아가야 한다고 보느냐?” 용건의 되물음에 왕건이 잠시 숙고하듯 주저하다가 이
“명학 스님께서 오셨다면서요?” 정청에서 홀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부인 한씨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렇소. 조금 전에 오셨다가 방금 가셨소.” “오셨으면 좀 부르시지 않고요! 안 그래도 조만간 산사로 찾아가 뵐까 하던 참이었는데.” “무슨 일로 말이오?” “시주도 좀 올리고, 우리 금지옥엽 같은 아들의 혼사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리려 했지요.” “혼사!” 아들의 혼담 때문에 잔뜩 날카로워져 있던 용건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니, 왜 이리 큰소리를 치고 그러십니까?”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그만……” 용건의 부인 한씨는 이제 마흔이 다 된 나이건만, 서른 초반으로 보일 정도의 뛰어난 동안이자 자색을 지니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다소곳하고 얌전한 외모였으나, 그와는 정반대로 대가 차고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송악의 크고 작은 대소사에 일일이 관여하려 들었으며, 다른 부인네들 같으면 자식을 많이 보지 못해 평생을 죄인처럼 살아갈 터인데도 한씨 부인은 도리어 아들 하나 낳아준 것에 감사하라며 떵떵거리기 일쑤였다. 천하 영웅이라 자부하는 용건에게 가장 무서운 최대의 난적은 바로 부인 한씨였다. “명학 스님께서 무슨 일로 귀한 걸
송악(현재 북한 개성시)은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한 곳으로, 본래 백제의 영토로서 당시에는 ‘청목령’이라 불렸다. 이후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부소갑’으로, 통일신라 시대에는 ‘송악군’으로 개칭되었다. 송악은 주변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다. 북으로는 천마산과 제석산, 중앙에는 송악산, 남으로는 진봉산과 용수산이 자리 잡았으며, 서쪽에는 만수산이 터를 잡고 있어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에 최적의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송도(松都)’라고도 불렸다. 또한 서쪽의 예성강, 남쪽의 한강 하류, 동쪽의 임진강이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수로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갔기에,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수행했다. 용건(龍建)은 이 송악을 다스리는 호족이었다. 그는 예성강과 임진강 하류 사이에 펼쳐진 넓은 평야에서 생산되는 곡물, 그리고 서해 해상 무역을 통해 축적한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패서 지역(황해도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용건은 온후하고 신중한 성품을 지녔으며, 세상 이치에 남달리 밝은 인물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둥그스름한 얼굴에 맑고 선명한 눈, 살집이 좋은 복스러운 코가 조화를 이
이튿날, 원방은 일찍 아침을 먹고 궁예를 데리고 관아로 나갔는데, 금일 안으로 오마 하고 사냥을 나갔던 기훤은 돌아오지 않았다. 헛걸음을 한 원방과 궁예는 땅거미가 질 때쯤 집으로 돌아와 같이 저녁을 먹었다. 이튿날 다시 관아에 나갔지만, 전날과 마찬가지로 기훤이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방은 이틀이나 헛걸음하게 한 궁예에게 미안한 탓인지, 장군의 사냥이 예정에 없이 길어진 것 같다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원방은 궁예에게 기훤이 돌아올 때까지 일단 거처에서 쉬고 있으라 했는데, 그 뒤로 사흘이 더 지나도 기훤은 사냥터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원방의 집에 머문 지 닷새가 되던 날, 하는 일 없이 거처에서 종간과 한담이나 나누며 무료하게 지내던 궁예에게 관아에서 나온 사람이 찾아왔다. 기훤 장군이 돌아왔으니 얼른 관아로 들어오라는 원방의 전갈을 가지고 온 심부름꾼이었다. 심부름꾼을 따라 관아로 들어간 궁예는 기다리고 있던 원방에게 기훤을 대할 때의 주의 사항을 간단히 전해 듣고, 기훤의 처소로 들어갔다. “장군, 말씀드렸던 이를 데려왔습니다. 우리 죽주가 나아갈 원려(遠慮)와 정세에 대한 식견이 아주 높고 깊은 자입니다.” 원방이 기훤 앞에서 궁예를
“사형의 밝고 높은 가르침이 저의 아둔한 머리를 일깨워 주는군요. 앞으로 사형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종간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앉은 자세로 크게 절했다. “그만해라, 이놈아! 말 하나는 정말 기름지게 잘하는구나!” “사형, 그러시면 제가 사형이 정한 길이 어떠한지 운수를 보아드리겠습니다.” “운수?” “예, 잠시 있어 보십시오.” 궁예는 종간의 말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종간은 바랑에서 손바닥 길이만 한 작은 대통을 하나 꺼내었는데, 그 안에는 스물댓 개 정도의 얇고 긴 나무 조각인 산가지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무어냐?” “이것이 말입니다, 사형. 사람의 앞날과 운수를 치는 점괘통인데, 이게 꽤 용합니다.” “운수?” “예,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지요.” 종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이 용한 술객인 양 의뭉스럽게 지껄였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배웠느냐?” “사형이 사찰을 떠나 계실 때, 삿갓을 쓰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방랑 스님 한 분이 주지 스님의 허락을 얻고 행랑에 거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지 스님께서 그분이 묵는 동안 도와드리라 명하시어 얼마간 그분 곁에 있었는
구름의 자취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하늘이 높고 푸르렀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산사의 지붕마다 흙먼지가 가득하고 한낮의 볕이 강렬하여, 날개 있는 짐승들도 그 기세를 피하려는 듯 공중에 멧비둘기 한 마리 뜨지 않고 도량 안에 뜨거운 기운만 가득했다. “사형, 뭐 하십니까?” 별당 뒤편 그늘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손에 쥔 짧은 나뭇가지로 흙바닥을 이리저리 그어 대던 젊은 중이 귓가를 때리는 소리에 벌컥 놀라 엉거주춤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따, 이놈아, 숨 넘어갈 뻔했다.” 말투는 거칠었지만 화가 배지 않은 깨끗한 목소리였다. “흐흐, 놀라셨습니까?” 궁예를 놀라게 한 것이 재미났는지 종간이 빙글빙글 웃었다. “이놈아, 귀에 대고 소릴 지르는데 안 놀랄 사람이 있겠느냐!” 종간의 때 묻지 않은 웃음소리에 궁예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져 소리 내어 웃었다.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종간이 궁예가 나뭇가지로 저어 대던 흙바닥을 요리조리 훑어보았다. 궁예는 종간이 나대는 꼴에 움찔하여, 짚신 발로 헤친 땅을 싹싹 쓸어버렸다. “여긴 왜 온 것이냐?” 궁예가 손으로 종간의 민머리를 쓰다듬었다. 종간은 흙바닥에 그려진 것을 확인하지 못
같은 시각, 내전에 시중 김준흥이 들어섰다. “시중은 견훤 장군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라의 우환이 많아 애를 많이 태운 탓인지, 진성여왕이 시름에 젖은 눈빛으로 준흥을 바라보았다. “폐하, 각간의 말이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애처롭고 가냘픈 여왕의 모습에 준흥의 가슴이 쓰려왔다. “견 장군의 이름만 머릿속에 맴돌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이오.” 여왕이 옥과 같이 희고 맵시 있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폐하, 견 장군의 일은 그리 신경 쓰실 일이 못 되옵니다. 폐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죽은 김대헌이는 각간의 조카입니다. 각간이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앙심을 품어 견 장군을 음해한 것이니, 이제 그만 마음을 푸시지요.” 준흥이 자상한 눈길로 왕을 위로하였다. “그렇겠지요. 짐이 요즘 마음이 어지러워 분별력이 흐려진 듯하오.”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여왕이 힘없는 웃음기를 보였다. 촛불에 비치는 여왕의 갸름한 얼굴선과 하얀 살결이 더욱 도드라지니, 그 아름다움이 실로 흠이 없는 천상의 여인이라 할 만하여 여왕을 대면한 준흥은 정신이 아찔해지고 가슴이 떨려왔다. 준흥이 여왕의 옥안을 빤히 쳐다보며 말이 없자, 여왕이 무슨 일인가 싶어 빙그레 웃으며 준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시작으로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까지 이어온 신라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중 제일 먼저 건국되었지만, 북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백제에 둘러싸인 폐쇄적인 지리적 조건 탓에 중국의 선진 문물을 가장 늦게 접했다. 그만큼 정치·사회적으로 중앙집권 국가의 면모를 가장 늦게 갖추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천문학, 불교문화, 과학적인 건축 기술 등 신라만의 독특한 문화 체제를 이룩할 수 있었다.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시기에는 율령 반포, 독자적 연호 사용, 활발한 외교 정책으로 대내외적인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대외 정복 사업을 펼쳐 한강 유역 확보, 가야 정벌, 함흥평야 진출 등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점유하게 된다. 제29대 무열왕(武烈王)은 대당 친선 외교로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정벌했고,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은 고구려 평정 후 삼한(三韓) 땅을 집어삼키려는 당나라의 야욕을 물리치고 끝내 삼한 일통(一統)을 이루었다. 하지만 문무왕 사후 어질고 현명한 임금이 나오지 못하면서 왕권이 약화되자, 진골 귀족의 세력 다툼과 왕위 계승 투쟁이 일어났다. 이로 말미
견훤의 부대는 이틀 후 반남군(潘南郡)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반남군을 지키고 있던 방수군 이백 명을 합류시키고, 근처 현(縣)에서 다시 오십여 명의 장정을 징병하여 군세를 오백 명 가까이 증강했다. 반남군을 떠난 견훤은, 다시 이틀이 지나서야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에 도착했다. 미다부리정은 무주(武州) 전역의 치안과 방위를 전담하는 핵심 군사 조직이었다. 조정에서 파견된 최고 지휘관인 대대감(隊大監) 한 명과 소감(少監) 두 명, 군영의 보급을 담당하는 화척(禾尺) 두 명, 그리고 하급 무관들인 삼천당주(三千幢主)들이 배속되어 본래 도합 삼천 명의 군사로 구성된 신라의 정예 군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신라 조정이 썩어 들어가면서 지방의 군 조직 또한 군기가 극도로 문란해졌고, 명색이 정예 군단이라면서 실제로 주둔한 군사는 천여 명도 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이미 지방 방위라는 본연의 뜻이 무색하게 된 지 오래였다. “군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하는 신범의 낯빛이 어두웠다. “이놈들 역시 백산성 성주처럼 왕명을 거부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능애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이런 개아들놈의 자식들이 있나! 왕명을 듣고서도 성문을 안 열어? 당장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싹 다 썰어 죽여 버립시다!” 관흔이 성을 공격하자고 자리에서 일어나 쌍욕을 퍼부으며 악착같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군막에 모인 장수들은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다시 지껄여댔다. “왜 다들 말이 없소? 싸움이 무서워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되신 게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추허조가 날뛰는 관흔의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지그시 견훤의 안색을 살폈다. 견훤의 얼굴빛은 그 어느 때보다 심상치 않았다. 추허조는 관흔에게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앉으라’ 속삭이며 눈짓을 보냈다. 그제야 견훤의 살벌한 기운을 감지한 관흔이 멋쩍은 듯 뒷머리를 슬슬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성이 작고 성벽이 높지 않다 하나, 지금 우리 병력으로 정면을 들이치기에는 벅찰 듯싶네.” 정탁이 평소처럼 차분하고 점잖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견훤의 부대는 미다부리정으로 가는 길목의 성읍에서 왕명을 전하고 군사를 징발해 왔으나, 지금 눈앞에 마주한 백산성(白山城)에서 입성을 거부당해 격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백산성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양무군(전남 강진)의 패전 소식을 전해 듣고 격분한 견훤은, 당장에 군사를 휘몰아 양무군 군영으로 달려갔다. 방수군의 주둔지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초토화된 상태였다. 칼에 맞고 목이 잘린 시체가 즐비했는데 대부분 신라군이었으며, 수적들의 야습에 대응해 접전을 벌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지휘 체계도 없이 저마다 살길을 찾으려 도주하다가 모조리 살육당한 자취가 역력했다. “형님!” 수적의 행적을 살피러 갔던 추허조가 급히 말을 달려온 듯 고삐를 힘껏 당기며 말을 멈춰 세웠다. “형님, 수적들이 이곳을 벗어나 내륙으로 흘러간 듯합니다.” “그럼 이곳에서 살아남은 군사와 적의 병력은 알아보았느냐?” “예, 남은 군사는 서른 정도 되고 수적은 천여 명에 가깝다 합니다.” “뭐라, 천여 명?” 덕용이 당혹해하며 되물었다. “예, 그렇다 합니다. 놈들이 야밤에 일시에 몰려와 이곳을 짓밟고, 다시 내륙의 읍과 촌락을 찾아다니며 약탈을 꾀하는 것 같습니다.” “수적은 지금 어디쯤 있다더냐?” “여기를 떠난 지 사흘이 되었으니, 반남군(전남 영암)에 다다르지 않았을까 합니다.” 추허조의 말에 안색이 무거워진 신범이 견훤에게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궁예는 그들이 산 위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후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발소리를 죽이며 따라 올라갔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밤길이었지만 궁예도 산길 경험이 많아서 어렵지 않게 뒤를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사가 심한 데다 한 시진(두 시간) 넘게 걸어서인지 등골에 땀이 솟았다. 한참을 더 가자 저쪽 땅 밑에서 뭔가 불쑥 튀어 올라왔다. “이제들 오시는가. 그래, 어떻게들 되었는가?” 은거지를 경계하는 파수꾼인 듯했다. “호환, 호환일세!” “뭐? 호환?” “맞네. 호환을 당했네! 전부 다 죽었단 말일세. 지체할 시각이 없으니 나중에 얘기하세.” 비적들이 다시 발걸음을 잽싸게 옮겼다. 파수꾼은 안타까워하는 듯 고개를 흔들며 있던 자리로 몸을 숨겼다. 궁예는 파수꾼의 자리를 자세히 봐두고 옆으로 돌아서 다시 불빛을 쫓았다. 한 식경을 더 걸어가자 마침내 패거리의 은신처가 나타났다. 꽤 널따란 평지에 굴피나무로 지은 굴피집 다섯 채가 단단하게 다져놓은 땅 양옆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 제법 큼직한 본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산채 입구 근처의 큰 수목 뒤에 몸을 숨긴 궁예는 적굴의 동정을 살폈다. 잠시 후 본채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덩치 큰 그림자 하나가 튀
궁예는 단숨에 관청 앞까지 달려가 보졸을 시켜 현령에게 접견을 요청했다. 현령은 낮에 노파에게 삿대질당하고 욕을 먹은 것이 영 찝찝하고 불편하여 처소에 들어 술을 들이켜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명주성주의 징표를 가지고 있는 궁예의 청을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동헌으로 들게 했다. “나리, 흉포한 비적들이 백성을 침탈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를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군졸을 모아 적도를 토벌하고 억류된 백성들을 구제하여 주시지요.” 궁예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최대한 예를 갖춰 말했다. “뭣이라? 이 소경 중놈이 명주성주의 낯을 봐서 침식을 대접해 주었더니 이제는 나를 능멸하려 드는구나!” 가뜩이나 노파의 일로 심사가 뒤집어진 데다 궁예까지 훈수를 두려 하니 현령의 화가 한 겹 더 치솟았다. “이 중놈아, 물고를 내기 전에 썩 꺼져버려라! 다시 한번 내 눈에 띄었다가는 하나 남은 눈마저 성치 못할 줄 알아라!” 현령이 화증을 내며 격분하여 앞에 놓인 책상을 탕탕 내리쳤다. 궁예는 혐오감이 일시에 치밀어 올라 굳어진 얼굴로 방을 나왔다. 현령은 이내 아전을 불러 아무도 들이지 말라 이르며 애꿎은 아전에게 온갖 짜증을 내고 꾸짖었다. “스님!” 그때 관아 안쪽
선방(참선하는 방)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조그맣고 까칠한 돌멩이 하나가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이 방바닥에 툭 떨어지며 고요함을 깨뜨렸지만 그 의도를 잘 알겠다는 듯 좌정한 승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날아든 돌멩이는 명상에 열중하던 승려의 뒤통수에 정확히 명중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승려는 말없이 그곳을 쓸어내리며 앉은 채 방문을 향해 몸을 틀었다. 문밖에서 승려의 수행을 보기 좋게 깨뜨린 자는 시치미를 떼려는 듯 얼른 몸을 돌려 근엄하게 뒷짐을 지었다. “아니, 살생에 가까운 몹쓸 짓을 하고도 점잖을 빼는 것이오?” 돌에 맞은 자의 항변에 고상한 척 서 있던 청년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 따지듯 말했다. “아니, 스님! 거 조그만 조약돌에 맞았다고 사람이 죽는단 말이오?” “허, 저것이 조약돌이오? 나야 내공이 충실하여 이 정도로 그쳤지 보통의 처사님들 같았으면 벌써 골이 깨지고 뇌수를 흘리며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오.” 방에서 참선하던 젊은 승려의 입심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알겠소, 알겠소. 내가 잘못했소. 내 이렇게 사과하니 노여움을 푸시오.” 비단으로 지은 고급스러운 고깔과 의복을 차려입은 청년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박규는 사냥에 쓸 활과 창, 그물을 닦고 벼리고 다듬게 하여 날랜 군사 십여 명과 몰이꾼 열 명을 준비시켰다. 꼬리 없는 충직한 수렵견 동경이(댕댕이) 네 마리와 박규가 특히 아끼는 사냥매인 수지니(사람 손에서 기른 매)까지 대동했다. 수렵의 호쾌함과 문소군의 미인들과 향락을 즐길 생각에 기분이 충만해진 박규는 출발일 새벽 해가 뜨기도 전에 수하들을 매섭게 재촉하며 문소군을 향해 출발했다. 박규는 목운정도 데려갔는데 공마(貢馬) 중에 날랜 준총(駿驄)을 내주어 옆에서 따르게 했다. 태수는 이동 중에 마상에서 “빨리빨리 걸어라” 호령하고 욕지거리를 해대는 끝에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중간 기착지인 산중 주막에 도착했다. 박규 일행의 길라잡이가 먼저 주막에 도착해 박규의 거동을 알려서 주막 주인 남정네와 여편네가 사립문 앞 한참까지 나와 박규를 영접했다. 장졸과 몰이꾼들은 말과 동경이를 몰아 마구간에 묶어두고 짐을 풀었다. 주막은 방 네 개와 부엌, 광, 마구간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막 주인 내외의 안방은 박규가 차지하고 나머지는 병졸들이 나누어 거했다. 몰이꾼들은 광에 이리저리 끼워 눕고 부엌은 주막 내외의 차지가 되었다. 박규는 방에 혼자 있기가 적적해서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