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그들이 산 위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후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발소리를 죽이며 따라 올라갔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밤길이었지만 궁예도 산길 경험이 많아서 어렵지 않게 뒤를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사가 심한 데다 한 시진(두 시간) 넘게 걸어서인지 등골에 땀이 솟았다.
한참을 더 가자 저쪽 땅 밑에서 뭔가 불쑥 튀어 올라왔다.
“이제들 오시는가. 그래, 어떻게들 되었는가?”
은거지를 경계하는 파수꾼인 듯했다.
“호환, 호환일세!”
“뭐? 호환?”
“맞네. 호환을 당했네! 전부 다 죽었단 말일세. 지체할 시각이 없으니 나중에 얘기하세.”
비적들이 다시 발걸음을 잽싸게 옮겼다. 파수꾼은 안타까워하는 듯 고개를 흔들며 있던 자리로 몸을 숨겼다. 궁예는 파수꾼의 자리를 자세히 봐두고 옆으로 돌아서 다시 불빛을 쫓았다.
한 식경을 더 걸어가자 마침내 패거리의 은신처가 나타났다. 꽤 널따란 평지에 굴피나무로 지은 굴피집 다섯 채가 단단하게 다져놓은 땅 양옆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 제법 큼직한 본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산채 입구 근처의 큰 수목 뒤에 몸을 숨긴 궁예는 적굴의 동정을 살폈다.
잠시 후 본채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덩치 큰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고성을 질렀다. 곧바로 다른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집 밖으로 나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횃불과 창, 칼 같은 병기를 쥐고 마당에 열을 지어 도열하더니 이내 울타리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궁예의 매서운 눈이 비적 패의 그림자를 쫓기 시작했다. 도합 아홉 명. 비적들은 궁예의 예상대로 큰 바윗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울타리 안에서 횃불을 들고 이들을 배웅하는 비적은 셋이었다. 궁예는 다시 숙고했다.
‘남아 있는 것들만 제압하고 불행한 소녀를 구원하여 일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저것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릴 것인가?’
그는 결단했다. 그것도 아주 신속하게. 단 며칠 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행을 겪고 여러 경험을 쌓다 보니 이제는 결단하는 일에도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다 죽여 없앨 것이다. 한 놈도 남김없이.’
궁예는 기민하게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가는 비적들의 행렬을 쫓았다. 비적들이 은거지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다고 느꼈을 때 궁예는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비적들은 횃불로 길을 밝히며 일렬로 걸어 내려갔기에 맨 뒤에 선 도적부터 차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네 개의 횃불이 웅웅 타는 소리를 내며 나아갈 때 다행히도 끝머리에 서 있던 비적의 걸음이 느려져 앞사람과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불빛 덕에 목표물의 형태를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기에 궁예는 망설임 없이 시위를 당겼다.
‘팍.’
날카로운 화살촉이 목덜미를 꿰뚫었다. 목이 꿰인 비적은 쾍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귀신같은 솜씨였다.
앞서가던 도적들은 아무런 일도 없는 듯 그대로 걸어 나갔다. 궁예는 다시 그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다음 목표물은 횃불을 들고 있었으나 주저 없이 살을 날렸고 전과 같이 정확히 목덜미를 꿰뚫었다.
“매복이다! 기습이다! 적이다!”
결국 궁예의 매서운 공격이 발각되고 말았다. 비적들은 당황하여 각자 들고 있던 병장기를 쳐들고 우왕좌왕하며 기습이라 소리만 질러댔다. 어차피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비적들이라 궁예는 대담하게 서 있는 자리에서 다시 화살을 재었다.
‘퍽.’
소리와 함께 횃불이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재차 화살이 날아들자 불을 비추던 또 다른 비적이 거꾸러졌다.
“불을 버려라! 불을 버려!”
비적 중 하나가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지 불을 끄라 소리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화살 한 대가 밤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날아갔고 또 한 놈의 비적이 사바세계와 하직했다. 불을 든 비적들은 하나같이 저승의 객이 되었다.
“엎어져라! 엎어져!”
비적들은 화살이 저들을 뚫을까 두려워 바닥에 엎드려 누워버렸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무력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극한의 두려움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적들은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 비참하고 참담한 상황을 바로 얼마 전까지 힘없는 민초들에게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행해왔던 자들이었다.
“날아갈 화살이 바닥났으니 이제 일어들 나시오.”
궁예가 어둠을 헤치고 나와 비적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깊었던 밤이 수명을 다했는지 어둠이 옅어지며 주변의 사물이 하나씩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자자, 일어들 나시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소. 화살이 정말 다 떨어졌소.”
엎드려 있던 비적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 순간 예리한 한 줄기 은빛이 궁예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궁예가 급히 상체를 틀어 가까스로 회피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비적들의 저승 동무가 될 뻔한 찰나였다.
놀란 궁예가 눈살을 찌푸리며 칼을 빼 들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굵은 나무 뒤에서 사내 하나가 쓱 걸어 나왔다. 늠름한 체구에 눈에 살기가 가득 찬 서른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아이고, 덕분에 큰일을 당할 뻔했습니다, 하하. 혹시 처사님께서 살인귀라 불리시는 그 호걸이십니까?”
궁예가 겨누었던 칼을 거두고 점잖은 체하며 성명을 물었다.
“네놈이 큰 바윗길에 있던 내 부하들을 죽인 놈이구나!”
다른 복병은 없는지 궁예의 주변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계하던 비적이 한 걸음 걸어 나오며 사납게 물었다.
“아, 예. 소승이 그랬습니다. 더 죄를 지으시면 나중에 흉물스러운 해충으로 환생하실 것 같아 제가 특별히 인정을 베풀었습니다. 수하분들이 이 정도로 생을 끝냈으니 다음 생엔 개나 도야지 새끼 정도로는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사료됩니다만.”
궁예 역시 한 걸음 다가서며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처사님께도 제가 인정을 베풀어 드릴 터이니 부담스러워 마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저승길로 드시지요.”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합장하는 모양새로 궁예가 나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요 하루 사이에 궁예의 담력과 배짱, 그리고 입심이 일취월장한 모양이었다.
비적은 기가 막힌다는 듯 크게 탄식을 뱉고는 장검을 빼 들었다.
“어린 중놈 새끼의 칼솜씨가 제법 쓸 만한가 보구나. 하지만 여기까지가 끝이다! 네놈을 죽이고 토막 내어 부하들의 원통함을 풀어줘야겠다.”
괴수가 남은 수하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일제히 창과 칼을 세우고 돌진해왔다. 이에 궁예도 힘껏 뛰어오르며 날아들었고 칼날과 창끝이 사방에서 찌르고 베어왔다.
궁예는 한순간에 적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는 목을 치고 팔을 베며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팔을 잃은 비적은 쓰러져 한 손으로 잘린 팔을 움켜잡고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질렀다.
괴수는 궁예의 비호 같은 칼솜씨에 혼이 나갔는지 칼자루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엉덩이를 뒤로 빼고 물러섰다. 살인귀라 불리는 괴수도 어느 정도 칼솜씨는 있었지만 정통 무예를 익히고 단련한 궁예에게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스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가 영웅호걸을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앞으로 극진히 모실 터이니 저를 수하로 받아주십시오.”
실력의 격차를 절실히 느낀 살인귀가 칼을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수그리며 더러운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었다.
약하고 가련한 이들에게는 가혹하고 잔인하게 굴며 사람 목숨을 새털처럼 가볍게 여기고 살인귀라는 잔혹한 악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인간. 그런 자가 강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도적의 괴수가 될 만한 교활하고 영악한 인종이로구나.”
궁예가 괴수 앞으로 걸어가 칼끝으로 그의 턱끝을 치켜올렸다.
“제 은거지에 있는 모든 재물을 바치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괴수가 침을 튀기며 주절대자 궁예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염라대왕께 가서 안부나 전하거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으로 면상을 내리쳤다. 괴수가 피를 튀기며 나가자빠졌다. 궁예는 검을 한 번 힘차게 내저어 날에 묻은 피를 뿌린 뒤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때 저쪽에서 팔을 잃은 비적이 베인 곳을 부여잡고 허우적대며 달려가다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도주했다.
궁예는 흙바닥에 떨어져 있는 창을 발등으로 차올려 잡고 눈을 비스듬히 뜨며 도망가는 비적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창을 재던 궁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창끝을 땅바닥에 푹 박아버렸다.
도망친 비적은 몸을 비틀거리며 궁예의 시야에서 점차 멀어졌다.
궁예는 주검들을 한 번씩 훑어본 후 숨을 고르고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파수를 보던 비적까지 가볍게 처치한 궁예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적굴로 돌입했다.
산채 마당에는 아낙 둘이 죽을상을 하고 멍석 위에서 곡식을 골라내고 있었고 비적 둘은 나무를 패고 있었다.
“넌 뭐 하는 놈이냐?”
비적이 궁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도끼를 들이대며 다가서자 궁예는 대꾸 없이 칼을 뽑았다.
비적의 가슴과 옆구리에 곱게 칼자국을 내어주고 비명소리를 듣고 방 밖으로 쫓아 나오던 나머지 한 명도 단숨에 거꾸러뜨렸다.
이로써 궁예는 외팔이가 된 비적 한 명만을 살려 보낸 채 관군조차 어찌해보지 못하던 포악한 홍산 비적 떼를 단신으로 완전히 분쇄해버렸다.
적굴에는 패거리들이 끌고 온 아낙 둘과 노파의 손녀딸까지 도합 세 명의 여인이 갇혀 있었다.
본래 다른 여인들도 몇 더 있었으나 수괴인 살인귀의 손에 이미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소녀는 병든 것처럼 얼굴이 야위고 핼쑥했는데 충격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듯 보였다.
궁예는 몸에 묻은 피를 간단히 닦아낸 후 소녀를 부축했고 남은 아낙들이 그 뒤를 따르게 하여 천천히 산을 벗어났다.
궁예는 마을과 가까운 주막에 소녀와 여인들을 머물게 한 뒤 마을 부잣집에 맡겨두었던 절따말을 찾아왔다.
주막에서 하루를 묵으며 그간 쌓인 피로를 풀고 먼지를 털어낸 궁예는 아낙들을 각자 살던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두 아낙은 적도들에게 욕을 당해 집으로 돌아가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게 분명하다며 차라리 스님의 절에 따라가 잔심부름이라도 하며 살게 해달라고 눈물로 사정사정했다.
차마 그녀들의 기구한 처지를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궁예는 우선 노파의 집까지 동행하며 차차 방도를 생각해보자고 달랬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녹록지 않음을 궁예는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달았다.
화전에서 손자와 함께 땅을 고르던 노파는 산 밑에서 올라오는 일행을 발견하고는 쇳소리 섞인 비명을 질렀다.
노파는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달려왔는데 허리가 굽은 탓에 마치 마구 굴러오는 것처럼 보였다.
노파와 손녀의 재회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아픔, 비탄과 환희가 뒤섞인 미묘하고도 애달픈 감정들을 자아냈다.
이 눈물겨운 광경을 바라보던 아낙들도 자신들의 처지가 복받쳤는지 집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가족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신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애절하게 울었다.
노파는 궁예에게 말했다.
“진정한 미륵 부처님이십니다. 미륵 스님이신 걸 내가 첫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굽어진 허리를 더욱 숙여대니 머리가 땅에 닿을 듯했다.
궁예는 이들의 상봉에 마음이 뭉클해졌고 헤어진 어머니까지 생각이 나니 눈물이 소록소록 차올라 넘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렇듯 감동적이고 감격적인 모습에 빠져들어 궁예가 미처 주시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새까맣게 탄 채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노파의 집터였다.
궁예가 몸이 굳은 듯 우두망찰히 서 있다가 소년에게 어찌 된 일이냐 물으니 궁예가 소녀를 구하러 떠난 당일에 노파가 이 집은 흉이 들고 귀신이 씐 집이라며 불을 놓았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주변에 불이 옮겨붙을 곳이 없어 큰 화재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살림 세간이 초가와 함께 재가 되어버렸고 사고무친인 노파와 소년은 거처할 곳이 없어 갖은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좁은 귀틀막에서 며칠을 지냈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궁예는 망연자실했다.
소녀와 두 아낙을 적당의 소굴에서 구원했으니 이제 세달사로 떠나야 했지만 몸 하나 뉘어 쉴 곳 없는 노파와 어린것들을 두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두 아낙의 앞날 또한 함께 생각해두어야 했다.
“산 넘어 산이로다.”
가족의 눈물 나는 상봉이 주던 감동은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스러져버렸다.
궁예는 멀찍이 떨어져 맨바닥에 홀로 주저앉아 이리저리 궁리하며 생각을 짜냈다. 저들이 거처할 집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재물이 있어야 했다.
김순식이 비상시에 쓰라며 챙겨준 은자는 며칠간 주막에서의 숙식과 노파의 병치레 값, 말을 맡겨둔 사례 등으로 모두 지불하여 이제는 객사에서 하루 묵을 객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적굴!’
궁예는 홍산 비적들의 은거지를 떠올렸다.
‘적당들이 민초들에게서 갈취해 숨겨둔 재물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 거처를 마련해준다면…… 하지만 그곳은 죽어도 다시 가고 싶지 않은 핏빛 소굴이다. 또한 훔친 재물을 내가 다시 훔치는 격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저 비적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고민에 빠진 궁예는 땅바닥에 있는 잔돌을 집어 들어 힘없이 던졌다.
“히히힝!”
그때 절따말이 앞발로 땅을 두들기고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별안간 한 가지 생각이 벼락처럼 궁예의 머릿속에 내리박혔다.
궁예는 절따말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말 앞으로 다가서서 머리와 목덜미를 다정하게 매만지던 궁예는 이내 훌쩍 안장에 올라탔다.
“잠시 마을에 다녀오겠습니다.”
궁예는 한마디를 이르고는 말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여보시오들, 눈 하나 없는 미륵 부처님이 있다는 말 들어보시었소?”
노파가 한 손으로 소녀의 등을 아래위로 쓸어내리며 아낙들에게 물었다. 아낙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그날 저녁이 다 되어서야 궁예가 돌아왔다.
아낙들은 궁예가 자신들을 버려두고 가버렸을까 봐 조마조마하고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노파가 정신이 온전치 않은 듯 눈을 희번덕거리며 별스러운 이야기들을 지껄여대니 마음이 더욱 산란해져 서로의 손을 움켜쥔 채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궁예가 돌아왔으니 얼마나 반가웠으랴.
두 아낙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지아비를 맞이하는 것처럼 쫓아 나갔다. 궁예의 손을 잡으려 서로 밀치고 눈물까지 내보이며 극성을 떨었다.
그날부터 두 아낙 역시 궁예를 미륵 스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궁예는 곡물이 든 자루를 내어주며 아낙들에게 저녁을 지으라 일렀다.
이어 노파의 손자와 함께 귀틀막에 든 농기구 등속을 대강 치운 뒤 다 같이 귀틀막에서 밤을 보내게 하고 궁예 홀로 재가 되어 뼈대만 남은 집터에서 한뎃잠을 잤다.
날이 밝아 아침밥을 지어먹은 후 궁예는 노파와 아낙들에게 필요한 세간을 챙기게 하고는 이들을 이끌고 걸어서 하루 거리가 되는 이웃 마을 방면으로 길을 잡아 출발했다.
길을 가던 노파는 궁예에게 말을 타고 가면 편하지 않느냐, 그런데 그 좋은 말은 어디다 놓고 왔느냐며 귀찮게 물어댔다.
궁예가 친교가 있는 분의 집에 잠시 맡겨두었다고 건성으로 대답하자 노파는 궁예에게 미륵 스님이 이렇게 답답하실 때가 있나 하고 혀를 찼다.
말은 타고 가라고 있는 것인데 맡겨두면 어찌하느냐 타박하며 참 잘생긴 말이었다느니, 생전에 그런 명마는 처음 보았다느니 말을 이어갔다.
또 아낙들에게는 말을 타보았냐 묻고 아낙들이 못 타보았다고 답하니 이런 딱한 여편네들 같으니 하며 동정하듯 혀를 차고는 말을 타면 임금님도 부러울 게 없다며 말에 대한 얘기만 계속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노파가 지껄이는 소리에 화가 돋고 짜증이 난 궁예는 헝겊 조각을 작게 뭉쳐 귀에 쑤셔 넣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이웃 촌락 외곽에 자리한 샛집(야생풀로 지붕을 엮은 집)에 도착했다.
이 샛집이 궁예가 마련한 이 가련한 이들의 새로운 생활 거처였다.
집은 방 둘에 부엌 한 칸, 자그마한 뜰이 있는 아담하고 정갈한 구조였다.
“미륵 스님, 여기가 스님 집입니까?”
노파가 하루 종일 걸어 피로한 탓인지 툇마루에 걸터앉아 주름 가득한 손으로 무릎을 토닥거렸다.
“앞으로 여기서 지내실 것이니 짐을 푸시고 편히들 쉬시지요!”
궁예의 말에 노파는 백 년은 묵은 듯한 주름살이 환하게 펴지며 진정이냐, 죽을 때까지 살아도 되느냐 물었다.
두 아낙은 들뜬 얼굴을 하고 마루에 올라 방 안을 오가며 둘러보고 부엌문을 열어보느라 분주했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궁예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노파 옆에 앉아 양손으로 노파의 허벅지를 조심조심 주물렀다.
“스님! 그럼 스님도 여기서 같이 사시는 겁니까?”
소년이 뜰에 그대로 서 있는 궁예를 올려다보며 자기가 듣고 싶은 대답을 내어줄지 간절한 표정으로 궁예의 낯빛을 살폈다.
궁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명료하게 말했다.
“나는 내일 사찰로 떠난다.”
궁예의 무정한 대답에 아이의 얼굴이 흐려지며 고개를 떨구었다. 내심 궁예가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할미의 뼈만 남은 허벅다리를 주무르며 옆눈으로 슬며시 궁예를 훔쳐보던 소녀도 아쉬운 빛을 띠며 옅은 분홍빛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미륵 스님 같은 고결하신 분이 어떻게 천박하고 모자란 이들과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노파가 어린 손자를 가르치듯 엄하게 말했다. 아낙들은 밥을 짓느라 부엌을 오가며 세간을 옮겨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부산을 떨었다.
“스님, 그럼 이 집은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소년의 물음에 궁예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설핏 어렸다.
“저 스님은 그냥 스님이 아니고 미륵 스님이시다. 미륵 스님은 못하는 일이 없으시단다. 내가 보니 이 집도 어제 뚝딱 만드신 게다. 네 누이를 구해오신 걸 보아라.”
노파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미륵 스님, 그런데 그 도적놈들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노파가 기이하고 형형한 눈빛을 하며 물었다.
노파의 질문에 소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할머니의 허벅다리를 주무르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궁예는 노파의 주책없는 물음에 대꾸 없이 정색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궁예의 뒷모습만 지켜보던 소년은 이내 누이의 품에 달려들어 안겼다.
“미륵 스님이 피곤하신 게지.”
노파가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보름달 빛으로 희끄무레해진 하늘은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며 아침을 알렸지만 노파와 아이들, 아낙들은 어제의 노곤함이 가시지 않았는지 거동이 더디었다.
“소승은 이제 물러가 보겠습니다.”
바랑을 짊어진 궁예가 뜰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아이고, 미륵 스님……!”
노파가 방문을 박차고 구르듯 맨발로 뛰어나왔다.
“미륵 스님, 벌써 가실랍니까?”
“여정이 많이 지체되어 일찍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녜, 녜. 그러셔야지요. 어서 가시지요. 어서, 어서.”
노파는 궁예를 말릴 생각도 없는지 마당에 모여든 새떼를 쫓아내듯 두 손으로 훠이훠이 저으며 서둘러 가라는 듯 손짓했다.
이때 방 안에 있던 아낙들과 소년도 밖의 소리를 듣고는 급히 뛰어나왔다.
두 아낙은 아쉬워하며 눈물을 지었고 소년 역시 눈가를 훔치며 물었다.
“스님, 다시 뵐 수 있을까요?”
“그래,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님을 잘 모시거라.”
궁예가 소년의 말에 답하면서도 무엇을 찾는 듯 집 주위를 짐짓 휘둘러보았다.
소년이 궁예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는지 고개를 돌려 외쳤다.
“누이, 어서 나와 보시오! 미륵 스님이 떠나신다 하지 않소!”
소년이 누이를 부르는 소리에 궁예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크흠” 하며 기침 비슷한 소리를 냈다.
“미륵 스님도 고뿔에 걸리는 모양이오.”
노파가 노망기가 도는지 희죽희죽 웃음을 띠었다.
궁예는 소년에게 누이를 부르지 말라 이르고는 몸을 돌려 사리문을 나서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너와 네 누이의 성명이 어떻게 되느냐?”
궁예는 아쉬운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짐짓 멋쩍게 물었다.
“제 누이는 은수이고 저는 은부입니다.”
“은수, 은부라…….”
궁예가 아이들의 이름을 되뇌며 사리문을 나섰다.
노파와 은부, 두 아낙은 궁예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배웅했고 방문 틈 사이로 밖을 주시하던 은수의 맑은 두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달사를 향하는 궁예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가슴은 후련했으며 마음은 뿌듯했다.
싱그러운 봄바람이 몸에 스며들어 내쉬는 숨소리마다 신선하고 향긋한 내음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몸이 붕 떠다니는 듯 가벼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실구름이 한가롭게 흐르다가 한 가닥씩 모여들어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선이 곱고 가늘어 언뜻 보니 젊은 처녀의 용모와 같아 보였다.
‘은수다, 은수.’
궁예는 불현듯 떠오른 얼굴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려는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은수의 선하고 맑은 눈, 청초하고 얌전한 그녀의 모습이 수시로 궁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혈기 왕성한 젊은 청년으로서 이성에 마음이 끌리는 일은 당연지사였으나 선덕사에서나 명주에서 보았던 귀족 부인이나 처녀들의 화려하고 수려한 외모를 접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처연한 자태의 은수.
궁예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했다기보다 사내조차 제 한 몸 보존하기 힘든 험난한 세상 속에서 연약한 그녀를 보호하고 그녀가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하며 아껴주고 돌봐주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그 마음이 궁예의 심장을 죄어왔다.
궁예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러 잡념에 빠져들다가 이내 허탈하고 스산한 웃음을 내뱉었다.
어느새 세달사로 통하는 일주문이 저 멀리서 어렴풋이 형상을 드러내며 궁예를 반기고 있었다.
강이오 작가의 장편 역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연재를 시작하며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1장 독안룡 - 1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1장 독안룡 - 2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1장 독안룡 - 3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2장 서남해의 호랑이 - 1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2장 서남해의 호랑이 - 2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2장 서남해의 호랑이 - 3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3장 정의의 道 - 1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3장 정의의 道 - 2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3장 정의의 道 - 3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4장 흔들리는 천하 - 1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4장 흔들리는 천하 - 2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4장 흔들리는 천하 - 3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5장 서라벌 - 1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5장 서라벌 - 2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6장 환속 - 1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6장 환속 - 2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6장 환속 - 3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7장 청송 - 1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7장 청송 - 2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7장 청송 - 3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8장 흑랑 - 1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8장 흑랑 - 2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8장 흑랑 - 3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9장 벼랑 끝에 핀 꽃 - 1편
[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9장 벼랑 끝에 핀 꽃 - 2편













